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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선한 능력으로2019-02-04 14:28
작성자 Level 10

‘정의’ 하면 떠오르는 한 역사적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독일 고백교회의 본회퍼 목사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겨울, 독일군은 이미 동서 양편에서 참담한 패배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은 파리를 수복하고 독일 영토를 목전에 두고 있었고, 나치를 향해 복수심에 불타던 소련군은 폴란드 국경까지 육박해 왔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 그런데 그 가운데 12월 19일 밤 테겔의 군 형무소 안에 갇혀 있던 한 죄수는 열심히 펜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디트리히 본회퍼, 독일 고백교회의 장래가 촉망되는 목사요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70회 생신에 보내는 축하 메시지이자 1주일 남은 성탄을 기리고 다가올 새해를 맞이하는 축시를 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능력에 언제나 고요하게 둘러싸여서 보호 받고 위로 받는 이 놀라움 속에, 여러분과 함께 오늘을 살기 원하고,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그는 이렇게 축시를 써 내려 갔습니다. 히틀러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힌지도 어언 20여 개월이 가까워오고 있었습니다. 그가 체포된 것은 매형 도나니가 열 네 명의 유태인들을 스위스로 피신시켜 준 것이 드러나고, 이어 사무실 수색 과정에서 반 나치 조직 활동에 관한 문서가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본회퍼는 히틀러가 반유태주의를 표방하며 정권을 잡았을 때부터 그에 반대했습니다. “교회는 바퀴에 깔린 희생자들에게 반창고나 붙이는 일에 만족하지 말고, 바퀴 자체의 바퀴살을 틀어막아야 한다”며 아직은 밝혀지기 전이었지만 그는 히틀러 암살계획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1년 반을 감옥에 갇혀있던 본 회퍼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옛일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어두운 날들의 무거운 짐은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지만/오, 주님/내몰린 우리의 영혼에 당신이 준비해놓으신 구원을 주십시오...” 8남매를 낳은 본회퍼 모친의 70회 생일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일찌감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목숨을 잃은 한 아들 말고도 두 아들과 두 사위가 감옥에 있었고, 더구나 아들 본회퍼는 약혼한지 3개월 만에 끌려간 판국이었습니다. 의사의 아내로, 귀족 가문의 딸로 안온하게 자라고 지내왔던 그 어머니의 일생에서 1944년 겨울은 못 견디게 추운 날이었습니다. ‘정의’라는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그런 어머니를 본회퍼는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우리에게 힘겹고 쓰디쓴 고난의 잔을 내미십니다. 목까지 가득 찬 고난의 잔을.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선하신 사랑의 손으로부터 떨림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그 잔을 받습니다...”


본회퍼는 “아리아인만이 교회를 맡을 수 있다”는 법령이 포고되었을 때 그는 이것이 ‘인종차별’이라고 비판하면서 정부가 권유하는 교회 목사직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교회’를 설립하여 당시 나치에 협력하는 독일 기독교와는 다른 길을 걷습니다. 1937년 게슈타포는 고백교회를 위한 지하 신학교를 폐쇄하고 목사들을 체포했습니다. 이 일제검거에서 벗어난 본회퍼는 각처에서 비밀 목회를 하고 있는 신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신학교육을 계속했습니다.


전쟁이 코앞에 닥치고 독일 전체가 전시 체제로 변하자 평화주의자로서 군복무를 할 수도, 나치에 충성할 수도 없었던 본회퍼는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 땅을 밟자마자 그를 초청한 저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에게 편지를 남기고 독일로 다시 돌아옵니다. “박사님, 저를 초청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미국에 오기로 한 것은 실수였습니다. 저는 독일 국민들과 함께 독일 역사상 지난한 시기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독일로 돌아갔고 결국은 감옥에 갇혔던 겁니다.

그는 이렇게 계속 축시를 써내려 갑니다. “그러나 당신이 우리에게/이 세상의 삶을 즐거워하고 태양의 빛을 즐거워하는 마음을 또 한 번 주신다면/우리는 지나간 해를 돌아보려고 합니다/그러면 우리의 삶이 온전히 당신께 속할 것입니다/당신이 우리의 어두움 속으로 가져오신 그 촛불들이/오늘 밝고 따뜻하게 타오르게 해주십시오/우리가 다시 하나 되게 해 주십시오/우리는 압니다, 당신의 빛이 어두움 속에서도 빛나고 있음을...”


수천만 독일인이 ‘하일 히틀러’를 부르짖고 그 연설에 도취하여 눈물을 흘리고 맹렬한 인종적 분노에 사로잡혀 유태인을 공격하고 집시들을 쓸어내고 슬라브인들을 학살하는 가해자가 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본회퍼는 촛불처럼 빛났습니다. 그리고 그 빛들은 초에서 초로 옮겨지듯 점점이 늘어나며 독일의 어둠을 밝혔습니다. 여기에는 그의 매형도 있었고 매제도 있었고 ‘작전명 발퀴레’의 슈타우펜베르크도 있었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의 주인공들도 있었습니다.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두 가지 존재방식에 의해서만 성립된다. 기도와 인간, 그 사이에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는 그 추운 겨울밤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를 계속 이렇게 써 내려갑니다. “깊은 고요가 이제 우리를 감싸게 될 때/우리들 주위로부터 보이지 않게 퍼져나가는/세상의 그 커다란 울림소리를 듣게 하소서/당신의 모든 자녀들의 높은 찬송의 소리를...”

본회퍼는 나치 치하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미친 운전기사가 버스를 몰고 있을 때 기독교인의 본분은 그 버스에 치어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러 주고 기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운전기사를 운전대에서 끌어내리는 것이다...” 그렇게 본회퍼는 미친 운전기사를 끌어내리기 위해 노력하다가 목숨을 잃습니다. 교수형 당시 입회한 의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50년 의사 생활 동안 그처럼 신의 뜻을 기꺼이 따르며 죽어가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본회퍼는 어머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또한 매일의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교수대에 서서 이렇게 말하고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합니다. ‘이제 시작이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유언대로 짧은 한 문장만이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 그리스도의 제자 디트리히 본회퍼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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